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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People/신앙으로 사는 사람들

여러분, 거리에서 일하는 이런 분들을 만나면 격려해 주세요

by Metapoem 2022.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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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일해서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곁에서 보기에는 단순하고 쉬워 보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뼈를 깎는 고생을 했을 것이고, 눈물을 삼켜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은 아름답고 고귀한 것입니다. 막스 베버의 기독교 윤리론을 거론할 것도 없이, 그리고 미국 청교도의 정신을 거론할 것도 없이 '일하는 것'(doing work)은 고귀합니다. 일의 종류도 너무 많아서 이루 셀 수 조차 없습니다. 

 

서빙하고 있는 사람
식당 서빙 장면

그런데 거리를 가시다가 이런 분을 보게 되거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면, 그를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길래? 하고 궁금해 하실 겁니다. 조금더 전제를 말씀드리면 이내 알아낼 겁니다.

 

*****

 

제가 어렸을 때, 부친은 크지 않은 의료원을(**의원)을 운영하셨습니다. 한국 경제 규모가 적었던 개발도상국 시기였지만, 가족의 생활은 조금 아주 조금 나아진 상태였습니다. 그전까지는 수제비를 먹고 살 때도 있었으니까요. 2층 건물에서 2층 전체를 임대해서 의원을 운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따끔씩 우리집에 방문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이들은 교회당에서 사역자로서 일을 하고 있던 분도 있었지만, 임지가 아직 없어서 공부하고 수련하는 시기로 보내고 있던 분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중년의 부부가 찾아 오셔서 담소를 나누고, 식사를 집에서 대접받곤 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젊은 남자 분이 - 그 당시 제가 10대였으니, 그분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 자주 찾아오셔서 중년 부부처럼 대접을 받고 가시곤 했습니다. 부친과 모친은 이런 분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영접했습니다. 곁에서 보고만 있었던, 곁에 앉으라고 하시면 곁에 앉아서 모임에 동참했던 저였죠...

 

중년의 부부는 이제 세상을 떠나셨고, 젊은 남자분은 지금 80대이실텐데, 세상을 떠나셨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인천에서 한참 사역하시는 것을 알았었으니까요. 이 남자분은 당시 전도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왜 우리집에 아니 부모님에게 찾아오곤 하셨을까요?

 

모여 예배드리는 모습
예배

 

네, 예배라는 방문도 있었지만, 그것은 외형적인 모습이었고, 실제로는 힘든 여건 때문이었습니다. 가정 예배가 끝나면 모친께서 준비한 음식으로 함께 식사했습니다. 이들이 떠나갈 때 부친은 흰 봉투에 감사헌금 명목으로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어드리곤 했습니다. 거의 빠뜨린 적이 없는 일종의 숭고한? 의식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남자 전도사는 건강한 체격이었는데, 아주 힘들어서, 부모님이 이분의 신학 공부를 거의 지원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주제로 들어가도 되겠군요.

 

여러분이 길에서, 어떤 남자가 곧 목사라는 신분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칫, 하고 무시할 게 아니라, 다가가서 수고하신다고 한 마디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냥 어디 아는 분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도 없진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생활을 하는 것은 힘들 겁니다.

 

 

문제는 이런 목사(들)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눈길을 보내는 분들이 적잖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같은 직종의 목사들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주 명확합니다.

"하나님 일을 하는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데, 기도하고 더 매어달려야지.".....

 

옳은 말입니다. 힘들 때에 더더욱 사역에 집중해서 여건이 나아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건 팩트니까요.

그런데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보편률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에 속한다."라는 이치에 따르는 게 가장 덕이 되고 옳습니다. 그런데 하루 세 끼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힘든 형편의 이런 분들은 현장으로 뛰어듭니다. 

 

그러면 정경인 성경에서는 어떤 근거를 사실로 보여주고 있을까요.

 

바울이라는 사역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그를 '사도'라는 직책으로 불렀습니다. 그는 여기저기 아주 넓은 지역, 여러 나라들을 오가며 활동했습니다. 그는 당연히 직업은 없었고, 사도직 뿐이었습니다. 여기저기 성도들이 주는 돈으로 생활하기가 일상적이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곁에서 도울 이들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텐트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서 텐트(장막)를 만들어서 돈을 벌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권능을 드러내며 수행했던 사람, 바울. 

그럼에도 그는 일을 해야, 배고프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믿음이 동반된 삶, 현실말입니다.

 

소위 "이중직 비판"이라는 논란이 아직도 팽배합니다. 2022년인 현대에 말입니다. 즉, 목사는 교회 강단에서 주로 일해야 하므로, 세속직을 수행하는 것을 금한다는 논리입니다. 환경이 주어진다면 그게 옳은 주장일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이중직으로 살아가도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의식이 아직도 교계 힘있는 분들이 주장할까요?

이들이 성장하셨던 한창 때의 한국 교계에서의 상황적 경험 때문일 겁니다. 성경 내용에 대한 따름 보다는, 현실적 상황에 더 힘을 실어주었던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즉, 힘들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과 사람을 통해 도우신다는 것 말입니다. 옳습니다. 이것도 팩트입니다. 그러나 영적 이치와 삶의 이치를 병행하는 것도 고귀한 신앙임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영적 경험이 적지 않았던 자였습니다. 그런 자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일하고 먹고 지냈습니다. 이건 배울만한 청렴한 삶의 모습입니다. 

 

두 남자가 바느질 하는 모습
사도 바울이 일하는 그림

 

************

 

여러분, 길을 가다가, 목사란 직책을 지닌 자가, 택배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택시 기사일을 하고 있는 걸 보거나 알게 되었다면, 혹은 트럭을 몰고 있다면, 혹은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면.... 여러분에게 부탁 드립니다.

 

"목사님, 수고 많으십니다."

"힘드시죠."

"보기 좋습니다."

등등.... 한마디 덕담을 건네주십시요.

 

열심히 일하는 사람
일하는 사람

 

그 한마디가 그에게는 더 착하고, 더 성실하고, 더 힘든 자들을 섬기며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잡게 합니다.

 

요즘 한국 교회 때문에 대한민국 시민들의 마음이 속상해 하는 것 잘 압니다. 

전 모 씨를 중심으로 해서 수년전부터 우리 나라를 시끄럽게 했고,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도 생각이나 언행이 개선되고 바른 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길에서 이중직을 행하고 있는 종사자 목사를 보게 되면,

"목사님, 수고 많으십니다."

"힘드시죠."

"보기 좋습니다."라고 말을 건네주십시요.

 

큰 힘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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