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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ature/겨울은 결코 짧지 않지

전우용, 류근. 논리와 객관을 갖춘 외침들, 절대로 무시하지 마라. 그 이유는, 반드시 그 선지자적 경고대로 국정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by Metapoem 2022.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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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전우용과 시인 류근이 쓴소리를 했나보다. 윤석열 대통령(이하 윤석열)과 그의 행보를 두고 한 말들이다. 이들은 인문성을 갖춘 학자이며 시인이다. 이들의 객관적 정체성에 의문을 품거나 아니라고 하는 자는 이 글을 읽지 말고 그냥 나가시기 바란다. 정상적인 대화가 안되는 덜떨어진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을 두고서, 친북이니 사회주의자니 하는 똥냄새나는 구취 소리하려면 나가시기 바란다. 국민들을 향해, "개나 돼지"라고 평가하는 정서가 와 닿는다면 그냥 나가시기 바란다. 

 

그 어느 시대에나 바른 소리하는 자들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그런 자들을 향해 '기인'이니 '또라이'니 하는 반응을 드러낸다. 동시에 이들의 등장으로 나름 지적당하고 꼬랑내 나는 속곳이 드러난 기분이 드는 당사자(들)는 당황해하기 시작한다. 이 순간 사실성을 따지는 자라면 '된 놈'이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듯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힘을 쓰게 된다. 그래서 억울한 피해자, 옥중 희생자, 옥중 순교자가 나오는 것이다. 긴 역사를 통해 본다면 이런 희생자들의 이름은 영구히 의인으로 남는다. 반면 한때 힘 있다고 마구 행사한 자들은 추악한 악마로 영원히 영원히 역사에 길이 남는 저주를 받게 된다. 그래서 그런 놈의 연놈의 이름은 아들의 이름으로도, 딸의 이름으로도 결코 쓰지 않는다. 

 

지금 전우용과 류근의 질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한번 숙고해 보는 자라면 '된 놈'이다. 그러나 비난하고 욕한다면 그가 언론사이든 방송사이든 정치가이든 등신이고 팔푼이다. 돈 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존재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문적 비판과 지적에 대해 경계의 자세를 취하는 자나 진영이라면 반드시 상대적으로 권력을 통해 돈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가 보여주는 반복되는 추악함이다. 2022년 5월 9일 이후 대한민국에는 이런 두 진영의 경계에서 대한민국인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런 마당에 두 사람이 등장했다. 조금 있다가 한 사람 더 등장시키겠다. 

 

1. 역사학자 전우용의 광야 외침

5월 18일 그가 the columnist에서 글로 외친 소리를 들어보자.

 

<고대 로마의 황제 네로는 대화재 이후 이반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수많은 기독교인을 학살했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기, 산 채로 불태우기, 굶주린 사자 앞에 세우기 등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잔인한 방법을 총동원했다. 그는 자기 행위를 비판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마저도 참혹하게 죽였다. 품행이 나쁘다고 소문난 포파에아라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자기 부인 옥타비아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기도 했다.

중국에 통일 황조를 연 진시황은 만리장성 쌓는 일에 수많은 백성을 동원하여 학대하고 죽였다. 자기의 폭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유학자를 산 채로 땅에 묻어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말이 길이 후세에 전해지도록 했다. 수나라 양제(煬帝)는 잦은 토목 공사와 침략 전쟁으로 백성들을 학대했다. 대운하가 완성된 후 그는 낙양에서 양주로 순행(巡幸)하기 위해 수십 만 명의 백성을 동원, 수천 척의 호화선단을 만들었다. 운하 인근의 지방관리들은 그가 요구하는 뇌물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을 악랄하게 수탈했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해골이 땅바닥에 널렸다는 말이 전할 정도였다.

 

조선의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의 원수라고 여긴 사람은 물론, 자기 폭정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사람들까지도 잔인하게 고문해 죽였다. 그가 직접 지시한 고문 및 살해 방법은 인두로 지지기, 손바닥에 구멍 뚫기, 가슴 빠개기, 뼈 발라내기, 마디마디 자르기, 산 채로 배 가르기, 시신을 태운 뒤 뼈를 빻아 바람에 날리기 등이었다. 실록의 사관(史官)은 그가 “일족을 멸(滅)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그에게 한 번만 밉보이면 부자 형제가 잇달아 잡혀 살육당하고 일가까지도 모두 처벌받았다”고 기록했다. 그는 남에게 잔인한만큼 자기 욕망에 충실했다. 전국 각지에 채홍사를 파견하여 수천 명의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잡아오게 했으며, 그들을 흥청, 운평 등으로 나누어 향락 도구로 삼았다. ‘흥청망청’이라는 한국형 사자성어가 생긴 연유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주제 시대의 군주 중에는 성군(聖君)보다 폭군(暴君)이 훨씬 많았다. 폭군들은 스스로 살인, 방화, 강간 등의 반인륜 범죄를 거리낌없이 저지르면서도 백성의 잘못은 사소한 것이라도 용서하지 않았고, 자기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자기는 무슨 짓을 해도 되지만 다른 사람은 어떤 짓을 해도 안 되며, 특히 자기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악랄하게 죽여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신념이었다. 현대의 심리학자 다수가 옛날 폭군들을 소시오패스, 즉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로 본다. 그들은 죄가 무엇인지는 알되 죄책감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자들이었다. 물론 제왕(帝王) 중에 소시오패스가 많았던 것이 혈통 탓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한자 문화권에는 제왕의 도덕률과 관련해 ‘제왕무치(帝王無恥)’라는 말이 있다. ‘제왕은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인데, 사람은 신체 부위든 사생활이든 남에게 보이기 싫은 것이 공개될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래서 이 말은 ‘제왕에게는 비밀이 없다’나 ‘제왕에게는 사생활이 없다’와 같은 뜻이다. 제왕은 모든 생활이 공개되고 기록되는 존재여야 했다. 하지만 자기 아버지의 후궁을 자기 후궁으로 맞아들인 당 고종을 포함해 많은 제왕이 자기의 파렴치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용도로 썼다. 그래서 이 말은 또 ‘제왕은 수치를 모른다’나 ‘제왕은 염치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파렴치가 제왕의 덕목이 된 이유이자 소시오패스가 제왕의 직업병이 된 이유이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지폐에는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다. 지폐 도안으로 사람 얼굴을 택하는 이유가 자국의 위인에게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인류는 먼 옛날부터 타인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감지하여 그의 뜻을 읽는 훈련을 거듭해 왔기 때문에 인물화에 특히 놀라운 식별력을 갖고 있다. 지폐에 사람 얼굴을 넣는 것은 위조 방지에 그 어떤 도안보다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표정을 보고 그의 기분까지 유추하는 것을 ‘눈치’라고 하며 이것이 배려(配慮)의 전제이다. 인류가 ‘눈치 있는 동물’이자 ‘배려하는 동물’이 된 것은 타인에 대한 자기 행위와 자기에 대한 타인의 행위 사이에 ‘등가 교환’의 원리가 작동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고대적 정당성은 절대다수 사람에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능력을 심어주었다. ”내가 남에게 한 만큼 나도 당할 수 있다“와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절대다수 인간에게 초역사적인 규범이자 상식이다.

제왕은 인간 사회의 일반 규범과 상식에서 벗어난 존재라는 점에서도 소시오패스였다. 그들은 ‘역지사지’가 안 되는 특이한 인간이었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는 자기와 남을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질환이다. 남에게는 자기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안기면서 자기는 온갖 황음무도(荒淫無道)하고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연산군 같은 인격체는, ‘무치(無恥)의 제왕권’만이 낳을 수 있었다.

물론 군주제가 폐지된 뒤에도 ‘무치의 제왕권’을 누리려 했거나 실제로 누렸던 권력자는 많았다. 히틀러, 스탈린, 폴포트 등 20세기의 대량 학살자들은 모두 남을 죽이는 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으면서도 자기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왕의 도덕률로 무장한 소시오패스였다. 그런데 그들의 권력은 혈통(血統)으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제왕의 자식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자식이었으며, 그런만큼 평범성 자체를 뒤흔들었다. 왕의 자식은 표준적 인간이 될 수 없었으나, 평범한 사람의 자식은 표준적 인간이 될 수 있었다. 예컨대 ‘악의 평범성’은 아돌프 아이히만이나 극소수 나치당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치 시대 독일인 대다수에게는 이민족 혐오와 잔인성이 시민적 미덕이었다. 평범성 안에 악이 깃든 사회에서는, 악덕이 미덕으로 인식된다.

 

제왕의 도덕률에 따라 사는 사람은 어느 사회에나 있다. 드물지만 그렇게 태어난 사람도 있고, 어릴 때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그렇게 된 사람도 있으며, 일종의 직업병으로 그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지난 70여 년간, 우리나라에는 제왕이 아니면서 ‘제왕의 도덕률’을 체화한 직업인들이 있었다. 자기와 타인에게 적용하는 법적, 도덕적 기준이 다른 것이야 인지상정이지만, 이 특수 직업인들은 그 차이가 극단적으로 벌어져도 인지하지 못한다. 이들은 똑같은 행위라도 남이 하면 ‘일족을 멸할 죄’이지만, 자기가 하면 ‘당연한 권리’라고 믿는다. 같은 행위에 다른 법적 기준이 적용되는 사회에서는 공정, 상식, 보편적 도덕률이 자리 잡을 수 없다. 아니, 인간성 자체가 존속할 수 없다. ‘독일인이 유대인을 강간하고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유대인이 독일인 앞에서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것은 죽을 죄’라는 나치 시대 독일인 다수의 상식은, 그들 자신을 ‘비(非)인간’으로 만들었다.

윤석열 정부 초대 국무위원 청문회에서는 ‘제왕무치(帝王無恥)의 도덕률’이 유감 없이 전시되었다. 상당수 후보자가 ‘남에게 적용하는 법’과 ‘자기에게 적용하는 법’이 극단적으로 다른 걸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다. 남에게는 ‘일족을 멸할 죄’를 적용해 놓고도 자기에 대해서는 ‘도덕적 비난’조차 용납하지 않는 태도는 군주제 시대 폭군의 태도와 완전히 같았다. 게다가 다수의 ‘주류 언론’은 이런 파렴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썼다. 남은 잔인하게 비난하면서 자기의 잘못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보도 행태를 반복하면서, 그들 자신도 ‘제왕의 파렴치’를 체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문제는 우리 사회에 이런 ‘제왕의 도덕률’이 존재한다는 점에 있지 않다. ‘수치를 모르는 인간’이나 ‘파렴치한 인간’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공정, 상식, 법치주의, 보편적 도덕률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가 된 것은, 이런 것들이 군주제 시대 ‘제왕무치의 도덕률’과 상극(相克)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는 ‘제왕무치의 도덕률’을 승인하고 동조하는 사람이 많다. ‘제왕무치의 도덕률’을 체화한 사람들이 다스리는 나라, 그들이 숭배되는 나라는 공화국이 아니라 제국이다. 그런 제국은 종종 소시오패스 국가가 된다. 소시오패스의 정신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개별적인 소시오패스 범죄보다 훨씬 두려운 일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전우용

전문을 옮긴 터라 좀 길지만, 잘 읽어냈다면 당신은 분명 지성과 인문성이 있는 민주 시민이다. 서울대 출신인데 이런 된 사람이 있는게 신기해 죽겠다. 역사학 정신이 온통 친일사관으로 썩은 곳이라고 전해들었던 학교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역사학자가 그나마 서울대 체면을 세워주려고 애쓰는 듯하다. 전우용은 18일 이날 페북에서 짧은 머릿말을 올렸다. 

 

<( '연산군 일기' 중 일부 인용) 말이 조금이라도 자기 비위에 거슬리면 명을 거역한다 하고, 자기의 여자 관계에 대해 언급하면 임금을 능멸한다 하여 온갖 구실을 붙여 없는 죄를 만들되, 곤장 100대를 가벼운 벌로 여기고 일족을 멸(滅)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아 한 번만 걸리면 부자 형제가 잇달아 살육되고 일가 친척까지도 유배당했다. 자기는 살인, 납치, 강간을 일삼았으면서도 타인에게는 '일족을 멸하는 법을 함부로 적용했던 연산군에 대한 사관의 평가이다. 남의 잘못은 과도하게 처벌하면서도 자기 죄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 것이 옛날 폭군과 현대 소시오패스의 공통점이다.  개별적인 소시오패스 범죄보다, 소시오패스의 정신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현상이 훨씬 더 두려운 일이다.>

 

 

2. 시인 류근의 광야 외침

시인 류근이 18일에 페북에 글을 올렸다. 그의 외침이다.

 

<광주를 점령군처럼 우루루 내려가시더니 이제 사회 기간 사업망까지 전리품처럼 팔아넘기려 들고 있습니다. 4대강, 자원외교, 방산 비리 등으로 수백조 국부를 유출하고 빼돌린 이명박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립니다. 공공 부문이 민영화/사유화되면 재벌과 외국자본의 배만 불리게 됩니다. 이런 주장을 또 선동이라고 왜곡하면서 굥정부의 신자유주의 폭력 행태를 지지하는 분들 가운데 대부분은 공공 부문 민영화/사유화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공 부문 사유화된 나라들이 지금 그 폐해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민들의 지옥입니다. 취임사에서 '자유'를 35회 입에 올린 분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시민의 자유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의 자유입니다. 자꾸 속아주면 결국 우리 세대 뿐 아니라 후손들의 미래까지 고사 당하게 됩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죽도록 개돼지 취급 받으면서 착취구조에 갇히게 됩니다. 지금 위기가 눈앞에 있습니다. 의료, 전기, 수도, 공항, 철도 등 민영화/사유화 절대 안 됩니다! 막아야 합니다!>

 

류근
시인 류근

 

전술했듯이 이런 쓴소리를 욕설이나 비아냥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지금 그 자리에서 나랏일 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에 불과한 졸장부들이다. 류근은 그 다음날인 19일, 페북에 글을 올렸다. 

 

<태극기부대 우리 셋째형이 아침부터 전화를 했다. 어제 저녁 동네에서 짜장면 먹고 있을 때도 하더니 오늘 아침에 또 한 거시다. 어이~ 류근! 내가 요즘 니 때문에 걱정돼서 잠이 안 온다. 니 그러다가 검사들한테 시범 케이스로 걸리면 뼈도 못 추리는 수가 있어. 검사들 만만히 보면 안 된다. 검사들 무서운 놈들이야. 너 그러다 엮이면 형이 사식 넣으러 댕겨야 하잖아~ 그러면서 세상이 바뀌었으니 눈치껏 살살 살라는 거시었다. 대학교 댕길 때에는 공안검찰, 짭새들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리는 수가 있다고, 군발이와 안기부, 검찰, 경찰이 얼마나 무서운 놈들인 줄 아냐고 몸조심하라는 소릴 이고 살았다. 그런 세상 안 만들려고 선후배 친구들이 죽어가고 스러져 갔다. 그런데 이제 와서 검사들 무서운 세상이 왔으니 숨죽이며 살라는 소릴 또 듣는다. 피를 토할 노릇 아닌가. 5.18 광주 민주화 항쟁 42주년이다. 신군부는 한 놈도 사과하지 않는다. 5.18을 이용해먹고 사용해먹고 소모해먹는 놈들만 득실거린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서정시인 연애시인 자퇴하고 저항시인 삘이나 빌빌 흘리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말 한 마디만 하면 선정적 신문기사에 괜히 불려댕기는 정치 과몰입 인사처럼 쪽팔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욕도 아까운 세월이 4대강 X물처럼 흘러간다. 김주대 형은 그림이라도 팔아서 지 혼자 막 치부나 하지. 나는 이거 뭐 실속도 없이 맨날 조심하라는 소리나 듣고... 아아, 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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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또다른 한 사람의 광야 외침, 세례 요한

이두메(에돔) 출신의 왕, 헤롯이란 자가 유대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부도덕한 자였다. 남동생의 아내까지 자신의 처로 만들어버린, 정치적으로 술수가 추악한 자였다. 하도 의심이 많아서 그 누구라도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는 관심법만 작동하면 죽여버렸다. 현대 한국 정치사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던 역사이기에 남의 나라 일이라고 욕만 할 순 없다. 이런 추악한 지도자를 향해 올곧은 외침을 설파한 이가 있었다. 요한이란 선지자였다. 그는 부친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 아래서 아주 강직하게 자랐다. 도덕적으로 명확한 신앙관으로 성장했다. 그는 종교적 역할만 감당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문제에 직접 개입했다. 결국 신앙은 곧 생활이고, 생활이 곧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다. 지금도 그러하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주요 대형 교회의 원로 목사들, 현 담임목사들, 각 교단장들)은 세례 요한의 궤적을 따라가야 한다. 즉 정부나 지도자들, 정치인들의 과오나 부도덕한 점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선지자적 비판과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다. 범죄 행위가 명확한 자라고 해도, 친교회적인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 진의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축복하고 지지를 드러내는 추악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와 세례요한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

금번 사례를 경우로 이야기하겠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윤석열을 축복하고 지지했다. 그러나 윤석열은 예수믿을 마음이 전혀 없는 자다. 무속에 기대며 살아온 자로 드러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도자들은 먼저 그에게 무속 신앙을 버리겠다는 고백을 하게 하고, 성경적 가치를 배우도록 이끌었어야 했다. 이런 선결과정은 고사하고, 그의 인척 여목사의 믿을 수없는 주장들을 목사들이 강단에서 지지하는 추태까지 보였다. 그 결국은 한국 교회가 고스란히 받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례 요한이 이 추태를 보았다면 어떤 불호령이 떨어졌을지 불보듯 뻔하다.

 

박정희, 전두환 때에 그리도 영적 간음짓을 했으면 회개하고 돌아서야 하는데, 그런 아양떨고 꼬리내리는 허망한 짓을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얼마나 해댔던가. 역시 이번에도 그러했다. 이런 꼬라지로 이중적으로 예수믿어 왔으니, 지난 약 70년간 광화문 등 대도시 광장, 체육관에서 그리도 '구국기도회'를 고함지르고 했지만 하나님은 한번도 응답해 주지 않으신 것이다! 북한과 제대로된 남북 문제 해결 진행이 진척된 적이 없다. 건물 지었다가, 공장지었다가 다 파괴되고 더 악화되지 않았던가! 기도 소리만 질렀지,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반된 영적 간음짓을 했기에, 응답은 고사하고, 듣지도 않으신 것이다. 2022년에도 그짓거리를 했다. 

 

제2의 세례요한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 일을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하지 못하니까 교회 밖에서 전우용, 류근 같은 이가 쓴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윤 정부의 보호와 지원를 바라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썩어빠진 짓, 헤롯과도 같은 짓이 부끄럽기만 하다. 돈, 이중장부, 탈세, 명예, 세습, 성적 일탈 등 교회 밖의 문제를 향해 외치기는 커녕, 스스로 안에서 허덕이고 있는 허약한 모습이 왜 진행중인 아픔일까! 그것은 세상을 향해 바른 소리를 질러대지 못하는 유약한 한국 교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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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나 여야 정치인들 특히 여당과 보수 진영의 사람들은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들어볼 필요가 있다. 당장은 써도 몸에는 양약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이들의 일갈들의 내용이 소설적이거나 창작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사건들이었고, 조선시대와 군사 시절의 팩트들이었다. 그러기에 역사적 경험을 통해 우러난 고통과 통회의 인식이기에 받아들여야 한다.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아니던가! 

 

윤석열은 먼저 들어야 한다. 듣고 새기고 반영하면 국정에 도움만 될 뿐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러나 듣지 못하고, 귀를 막아버리면, 하늘의 저주는 곧장 수직적으로 낙하할 것이다. 또 그래야 하고. 이유는, 옳은 가치와 외침을 듣지 않은 죄를 저질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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